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뉴펀들랜드 래브라도 (문단 편집) == 역사 == [include(틀:캐나다의 역사)] 유럽인의 발견 이전부터 아메리카 원주민이 거주하던 섬이었다. 10세기 후반 [[바이킹]]이 [[아이슬란드]]와 [[그린란드]]를 넘어 이 곳에 정착하였으며, 이 사실은 1960년에 뉴펀들랜드섬 북부에서 바이킹의 정주 유적 '란세오메도스(L’Anse aux Meadows) 역사 지구' 가 발굴되어 '''[[콜럼버스]]의 신대륙 발견 이전에 유럽인이 북아메리카에 도달했음이 입증'''되었다. [[사가]]에서 말하는 [[빈란드]]가 이 곳으로 비정되고 있다. 예전에는 아메리카 원주민인 베오투크족이 거주하던 곳이었지만, 현재는 소멸되었고 동시에 이들이 쓰던 베오투크어도 소멸되었다. 1497년 탐험가 [[존 캐벗]]이 북대서양을 건너 이 섬을 재발견하였으며 이후 잉글랜드령이 되었다. 북미 최초의 유럽인 정착지 중 하나가 건설된 곳이었으나 농업에 불리한 땅이라 초기 이주민들이 이래저래 고생하다가 이 중 상당수는 미국 동북부 [[뉴잉글랜드]]로 재이주한다. [[프렌치-인디언 전쟁]]을 포함한 16세기 북아메리카에서 벌어진 일련의 영국 - 프랑스 간 전쟁에서 섬 주요 항구도시이자 지금의 주도인 [[세인트 존스]]가 몇 번이나 프랑스군의 점령을 당하거나 불태워지기도 했다. 1855년 영국 지배하의 식민지 자치 정부가 수립되었고 1907년에 [[뉴펀들랜드 자치령]]이라는 고도의 자치권을 누리는 자치령(dominion)이 되었다. 이후 경계선을 맞댄 캐나다 자치령의 연방주로 합류하는 것보다는 독자적인 자치령을 유지하는 쪽을 선택하였다. 1931년 [[웨스트민스터 헌장]]의 발효에 따라 자치령들이 외교·국방 권한까지 영국 정부로부터 넘겨 받아 사실상 독립국이 되었는데, 뉴펀들랜드도 그 대열에 동참했다. 하지만 몰아닥친 [[세계 대공황]]으로 인해 재정적 어려움에 처하게 되자 1934년 독립적인 지위를 포기하고 영국 정부의 직접 통치를 받는 쪽으로 돌아왔다. 이는 독립국이 스스로 자신의 독립을 포기한 몇 안 되는 사례에 속한다. [[제2차 세계대전]]을 거치고 난 뒤 1949년 주민투표를 통해 근소한 차이로 캐나다 연방으로의 가입을 선택하였다. 이 때 두 번에 걸쳐 주민투표를 실시했다. 1차 투표는 옛날과 비슷한 자치령 정부를 복원하는 것(Responsible Government), 캐나다에 가입하기(Confederation with Canada), 기존 정부 형태(Commission of Government. 즉 영국의 직접 통치를 받는 방식)를 놓고 투표를 했다. 1차 투표에서 영국 직할령 유지를 선택한 사람이 15%정도로 꼴찌를 차지해, 캐나다연방 가입(2위)과 자치정부 복원(1위)의 선택지를 2차 투표에 부쳤고 그 결과 역전되어 5%차로 캐나다 가입이 결정되었다. 이에 따라 캐나다에 마지막 10번째로 가입한 주가 되었다. 캐나다 연방 가입을 결정하게 된 결정적 원인은 2차대전이 끝난 이후 영국의 재정난으로 인해 경제적 지원이 끊겼고, 캐나다에 경제적 지원을 요청했으나 연방에 가입하지 않으면 지원도 없다는 답이 돌아왔기 때문이다. 뉴펀들랜드 지역에는 전쟁 중 섬에 미군기지가 설치되었었고 이때의 경험을 통해 차라리 미국령이 되자는 의견도 상당했지만 영국이 이 안을 투표에 부치는 것을 거부했다. 당시 캐나다는 거의 독립국이 되긴 했어도 같은 [[영연방]] 소속인 데다가[* 원래 모든 영연방 회원국은 영국 국왕을 자국 국왕으로 해야 한다는 의무가 있었기 때문에(1949년에 [[인도 자치령]]의 요구로 폐지) 당시에는 이런 용어가 없었지만, 영국, 캐나다나 당시의 뉴펀들랜드는 모두 현재 기준으로 [[영연방 왕국]]에 해당될 정도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.] 당시만 해도 [[대영제국]]의 일원이라는 정체성이 확고한 편이었다. 그러나 미국은 영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이 되긴 했어도 전쟁도 치뤘던 한때의 가상적국이었고 대영제국의 산하가 아닌 별도의 '제국'이었으니 영국으로서는 이걸 받아들이기 꽤 껄끄러웠을 것이다. [[파일:external/3.bp.blogspot.com/The+Confederate1948.GRIFFIN%5B2%5D.jpg|width=400]] 위는 1948년의 주민투표 당시 캐나다 연방 가입 찬성파가 신문에 낸 프로파간다 포스터. --애들에게 우유를 더 먹일 수 있다니 너무 애절하다-- 대륙부의 래브라도 지방은 래브라도 반도 주요부를 차지하는 [[퀘벡]] 주와 귀속 혹은 경계선 문제를 놓고 갑론을박이 오랫동안 지속되었으나, 1927년 영국 추밀원 사법위원회에서 양 지역의 경계를 확정하였다. 현재 퀘벡과 뉴펀들랜드 래브라도의 육상 경계는 대체로 분수계를 따르지만, 남쪽은 그렇지 않다. 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Labrador_boundary_dispute.png|width=400]] 연방 가입 이후에도 다른 주들에 비해 성장이 더딘 편이었고, 1970년대에 50만 명을 돌파한 인구는 1980년대를 정점으로 다시 줄어들어 2020년대에도 52만 명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. 캐나다 전체나 브리티시컬럼비아, 앨버타 등의 빠른 인구증가 속도와 대조되는 모습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